지난 5월은 입하소만 절기인가 하면 `신록의 달`, `가정의 달` 계절의 여왕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초여름인 6월은 창살 무늬진 햇볕 한 장 등에 지고 이윽고 앉아 있으면 햇살은 흡사 정다운 연인처럼 포근히 목을 두른 같기도 하며 식목이 가장 청초한 달이다. 꽃으로 수놓은 정원을 거니는 찰나 15세기 학자 김종직(1431~1492년)이 성종의 전교를 받아 연혁과 기능을 기록한 `내반원기`의 주요 내용들이 차창을 스치는 가로수처럼 펼쳐졌다.
조선시대 내시는 궁녀와 함께 궁중 업무를 담당한 주요 인물이었다. 내시도 엄연히 품계와 관직이 있는 전문적 공무원이었다. 최고 직인 상선 내시는 종2품으로 요즘과 비교하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궁궐 안에는 내시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인 내반원(內班院)이 있었다. 내반원은 임금을 모시는 내시의 업무 성격상 처소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성종실록`에 `성정원에 전교해 내가 일찍이 대루원(待漏院)기와 내반원기로서 여러 신하와 내관을 경계시키려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성종이 내시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이 글을 짓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종직은 조선시대 내시의 연혁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본조에서는 처음 국도를 정한 이후로 내시부를 영추문 밖에 두고, 또 액정서(掖庭署)의 영항(永巷) 겉에 내소방(內小房)을 만들어서 심부름하는 내시들이 밤낮으로 임금의 명을 받드는 곳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우리 성상(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거기에 내반원이라고 이름을 내렸으니 이는 송나라의 옛 제도를 따른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외정반(外庭班)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외정반에는 삼공육경(三公六卿)으로부터 백집사(白執事)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공경과 백집사들은 대궐 뜰에 모여 알현 하는 것이 때가 있고, 일을 아뢰는 것도 정해진 날이 있으므로 특별히 면대하는 명을 내려 계책을 논의하는 기회가 아니면 청규(淸規)에 엎드려서 임금의 안색을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흔치 않다. 그래서 내운반원의 중관들이 조석으로 임금을 대해 전후좌우에서 빙 둘러 모시고 있으면서 임금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을 낱낱이 친숙하게 받을 수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대체로 이처럼 미천한 자격으로 대권 안의 깊고 엄숙한 곳에 있으니,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의당 어떻게 해야겠는가? 김종국은 역대의 모범적인 내시를 소개하고, 내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만약 참소하고 아첨해 임금을 유혹하고, 비위를 맞추고 간사함으로서 은총을 받아서 자기 당류를 끌어들이고 충량(忠良)한 사람들은 시기해 해치며 성색(聲色)과 기교(技巧)를 베풀고 재리(財利)를 긁어모으는 등 무릇 임금의 불행에 한 번 그 마수에 빠져들기만 하면 환관의 지위를 빌려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 방자하고 거만해도 감히 막을 자가 없게 돼 눈 한 번 홀긴 혐의로 반드시 갚으려고, 자기 본가의 족속들까지도 영화롭고 귀한 지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래서 출척(黜陟)과 형상(刑賞)의 권한이 남몰래 그들에게도 옮겨져 끝내는 국가가 위란하게 되고 자신의 몸이 칼날에 잘리게 되는 것이니, 제나라의 수초로부터 한. 당. 송나라의 여러 환관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법칙인 것이다. 내시는 임금의 최측근에서 온갖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오늘 날로 치면 청와대 부속실 직원과 가장 가깝다고 할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내시의 임무에 대해 `궁궐 안의 음식물을 감독하고, 왕명을 전달하고, 궐문을 수직(守直) 하고, 청소하는 임무를 담당 한다` 고 규정해 내시의 업무는 정치에 관계되는 측면이 적으나. 내반원기 에서 언급한 대로 왕의 측근임을 빙자해 당류를 끌어들이거나 재물을 긁어모으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 방자하고 거만하게 굴면 감히 말을 막을 자가 없게 됐다 는 사실은 현 정치세계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내시의 권력화를 경계한 조선에서부터 오늘 날까지 권력에 빌붙어 세상을 휘두르는 정치문화는 언제 청산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지난 정권에서도 최측근을 자임하는 자들의 국정 농단으로 촛불 정부가 탄생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